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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 민주주의]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민주정치가 강한 이유
  • 작성자 운영자 등록일 2018-12-26

 

[세계사 속 민주주의]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민주정치가 강한 이유 

 

다리우스 왕 (기원전 550년경~기원전 486년경)의 통치 하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인더스 강에서 이집트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고 수천만 인구가 페르시아의 통제 하에 있었다.

 

 ‘왕의 눈’ ‘왕의 귀’들이 전국을 누비며 제국의 소식을 왕에게 전달하고 왕의 명령을 지방에 전파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가 관대하고 출중한 통치자이긴 했으나 페르시아는 궁극적으로 철저한 전제 군주제를 고수했다.

 

서쪽의 지중해 세계로 뻗어나가던 페르시아는 험준한 반도 안에서 여러 도시 국가를 세우고 살던 그리스인들과 마주하게 됐고 다리우스 왕은 항상 그랬듯 상대방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물과 흙을 바치라.” 곧 전 국토를 들어 바치라는 협박의 은유였다.


 

스파르타 이미지 

용맹하게 맞선 스파르타 이야기는 이미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출처 : maxpixel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이에 굴복했다. 그러나 세 나라는 예외였다. 아테네, 스파르타, 그리고 에레트리아였다. 아테네는 “아테네를 바친다.”고 외치면서 페르시아의 사신을 연못에 집어던져 버렸고 스파르타는 깊은 우물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에레트리아 사람들은 즉석에서 사신을 때려 죽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분노한다. “에레트리아, 아테네 그리고 스파르타였군. 자 긍지 높은 페르시아의 장군들이여. 이제 그대들의 능력을 보이라..” 페르시아는 제국의 힘을 기울여 이 세 도시국가를 향하여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헤로도투스의 저작 <역사>의 주무대가 되는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세 번씩이나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참담한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헤로도투스 동상 사진 

<역사>의 저자 헤로도투스 동상
출처 : Pixabay

 


페르시아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일화들을 품고 있다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의 황금기를 이룬 다리우스 왕의 군단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 이후 이 벅찬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빨리 전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 가까스로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소”를 전한 뒤 숨을 거뒀던 전령 페이디피데스의 이야기,

 

 단 300명의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테르모필레의 혈전, 테르모필레를 함락한 후 육지를 통해 전 그리스를 휩쓸고 아테네까지 점령한 페르시아의 허를 제대로 찔렀던 살라미스 해전 등 어린 아이들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들 여럿이 이 전쟁을 통해 배출됐다.

 

그런데 그리스는 왜 승리했던 것일까? 영토로 따지면 수십 분의 일도 못되고 인구로 보아도 그와 비슷한 처지요, 경제력 또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깔고 앉은 페르시아의 부(富)에 비하면 그리스의 그것은 갖다 대기조차 민망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리스는 어떻게 이겼을까.


페르시아 제국은 거대했지만 그 거대한 페르시아 국민들 모두는 왕의 ‘노예’에 해당했다. 심지어 귀족들과 지방관들도 왕 앞에서는 “당신의 노예”임을 자처했다. 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화가 크세륵세스 왕의 출정 직전 일어났다. 페르시아의 일부였던 리디아 (오늘날의 터키 지역)의 피티오스라는 사람이 크세륵세스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아들이 다섯 있는데 모두 폐하의 군대에 소집됐습니다. 그 중 하나만 남겨 두시어 늙은 저를 돌보게 해 주십시오.” 이 부탁이 크세륵세스의 비위를 건드렸다. 크세륵세스는 피티오스가 곁에 두고자 했던 그 아들을 잡아 죽여 사지를 잘라 길 양쪽에 몸통과 팔다리를 분리해서 놓아 두었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그 사이를 행진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일종의 본보기였다.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조금이라도 거역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를 크세륵세스는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테네의 적색상토기 사진 

재단 너머로 투구와 방패를 받는 젊은이,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적색상토기
출처 : 위키백과

 


반면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주 (아테네 정권을 탈취하여 무력으로 통치한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전제 정치의 지배를 받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이웃의 도시들보다 전쟁에서 나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 멍에를 벗어 던지자 그들은 세계 최고의 전사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 즉 왕이나 그에 필적하는 독재자, 또는 귀족의 부하로서보다 고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일원이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빅터 데이비스 헨슨은 그의 저서 <살육과 문명>에서 그리스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첫째 말할 수 있는 자유. 페르시아 전쟁 내내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다. 어디에서 싸울 것이며 누구를 선봉에 세울 것이며, 무슨 전략을 세울 것인지 장군들은 멱살잡이 직전까지 가며 싸웠고 병사들 역시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그런 발언의 자유를 누린 끝에 나온 결론에는 누구든 복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신뢰다. 아테네를 승리로 이끈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이든 그와 앙숙처럼 대립했던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이든 그 나라의 국방력의 근간이 되는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거나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즉 자신에게 내려지는 명령에 자신의 권리와 책임도 포함돼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 그리스 병사들, 즉 시민들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즉 싸워서 이겼을 때 ‘얻을 것’이 있고 그를 보장하는 체제가 있으며, 전쟁에서 진다면 ‘잃을 것’이 있다는 얘기다. 자신의 소유를 빼앗기지 않으려 할 때 인간은 가장 용감해지지 않던가. 그리스군의 주력인 중장보병 호플리테스들은 일반적으로 10 에이커 정도의 토지를 소유했는데 그들의 토지 점유율은 2/3가 넘었다. 즉 노예를 제외한 시민들 기준으로 보면 그리스 폴리스는 빈부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넷째는 개인적 행동의 자유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로 된 성벽에 의지하라.’는 신탁을 두고 ‘나무로 된 성벽’이란 곧 배라고 주장하며 해전(海戰)으로 결판을 보자고 주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에 따랐으나 일부 아테네 시민들은 목책을 두르고 최후까지 아테네에 남았다. 군대가 편성된 후에는 군령(軍令)이 적용됐겠지만 전쟁 직전까지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갈 곳을 정하는 그리스인들이 많았다. 만약 페르시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머리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으나 그리스에서는 그런 일이 자연스러웠다. 개인의 행동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다.

 

 

 바티칸의 아리스토텔레스 그림 

바티칸의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 pixabay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갈파한다. “자유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이다. 이것이 자유의 특징이며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노예의 특징이다.” 손바닥만한 그리스의 손톱만한 폴리스들이 당시까지의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했던 페르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자유의 힘이었다.

 

비록 노예와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자유였으나 자유를 누리던 시민들에게는 페르시아라는 거인의 발목을 물어뜯어 쓰러뜨릴 만큼 결사적이고도 강력한 의지의 원천이 됐던 것이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專制)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헤설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중략)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基幹)은 자유다. (중략)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중략)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자유의 비밀은 용기고 용기의 원천은 자유다. 그렇게 자유와 용기는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수천년 세월을 넘어, 수만리 거리를 넘어 가열차게 역사를 관통한다.

 

 

필진 : 하산자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 전공인 국사와 세계사를 틈틈히 공부해 SNS와 블로그에 역사 관련 글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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